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빅토리아 여왕 (문단 편집) ==== 말년 ==== [[파일:1280px-Queen_Victoria_by_Heinrich_von_Angeli.jpg|width=500]] 노년의 여왕. 1878년 [[12월 14일]] 차녀 [[영국의 앨리스|앨리스 공주]]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병사했고 60세가 된 다음 해에 첫 증손녀인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ss_Feodora_of_Saxe-Meiningen|작센마이닝겐의 페오도라 공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빅토리아 황후]]의 장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1860)|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샤를로테]]의 외동딸이다.]가 태어남에 따라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남편과 자식을 앞세우는 비극을 겪은 여왕은 가장 아끼던 막내딸 [[영국의 베아트리스(1857)|베아트리스 공주]]에게 한층 더 매달렸다. 베아트리스 공주가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_Henry_of_Battenberg|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 딸과 사위가 결혼 후에도 영국에서 거주하며 자기 곁에서 지내는 걸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할 정도로 여왕은 젊었을 적의 완고했던 성격이 노년에 접어들어 더욱 강해졌다. 이런 여왕의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격은 외교와 군사 문제에서 강경한 대응을 통해 영국의 위신을 세우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1877년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공격해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하고 불가리아를 할양받자 이에 반대해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여 1878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산 스테파노 조약]]을 폐기하고 러시아 몫으로 돌아갈 영토를 크게 줄여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고, 뒤이어 각종 악재가 여왕과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1881년과 1885년에는 각각 남아프리카와 수단에서 [[영국군]]이 패퇴했고, 1882년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발한 [[아일랜드]]에서 [[총독]]이 비밀결사에 암살당했고, 1870년대와 80년대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은 아일랜드 자치동맹, 아일랜드 토지동맹을 거쳐 아일랜드 민족동맹을 만들고 아일랜드 자치당은 50여 명을 영국 의회에 진출시켰다. 아일랜드 자치당은 캐스팅보더 역할을 하며 몸값을 높여 [[영국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을 도와 아일랜드 토지법과 아일랜드 자치법을 통과시켰다. 이런 조짐은 [[대영제국]]의 최전성기가 끝나고 내리막으로 접어든 신호탄이었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여왕은 개인적인 비극이나 대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왕위를 지키며 1887년에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는 골든 주빌리를, 1897년에는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성대하게 거행했다. 당시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재위 기간을 뛰어넘은 빅토리아는 생전에 이미 [[대영제국]]의 구심점으로서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빛나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팽창주의는 도리어 이 내리막 시기에 더 극대화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